신의 기록을 읽고…

 

로제타 스톤을 해독한 사람들의 이야기, 신의 기록을 읽고 간단하게 감상문을 작성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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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지구 상에서는 많은 문명과 언어가 사라졌고 현재도 수십 개의 언어가 소멸 위기 언어로 분류되고 있다. 또한 학자들은 머지 않은 미래에 현존하는 언어 중 반수는 사라질 것이라 예견한다. 지금의 우리는 이미 소멸한 문명과 언어를 다양한 기록을 통해 발견 또는  연구할 수 있고, 본서에 나오는 로제타 스톤도 그 중 하나다. 이와 같이 물질적으로 보존되기 쉬운 기록은 추후 발견될 가능성도, 해독될 가능성도 그럭저럭 높을 것이다.
그렇게 남겨진 기록들을 발견하곤 읽는 방법도 뜻도 모르는 언어를 해독하는 학자들의 연구 방법과 그 과정을 읽으며, 만약, 피치 못할 사정으로 현대 인류와 대부분의 문명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현대에는 석판은커녕 종이로 기록하지도 않는 일이 점점 늘어나고 책을 포함한 대부분의 기록이 실존하지 않는 ‘데이터’라는 형태로 존재한다.
만약 불운한 사건으로 인해 문명을 잃은 인류가 수십, 수백 년 후에 바닷속에서, 모래사막에서 태블릿을 발견했을 때, 이는 어떻게 작용할까? 그런 상상을 하며 이 감상을 작성해 보았다. 부디 현대의 우리들이 사용하는 스마트폰, PC, 테블릿 등이 후대의 나칼 비문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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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와 바깥을 차단하기 위해 아무렇게나 벽에 덧댄 천 사이로 햇빛이 비쳐들었다. 막대기와 판자를 이용해 얼기설기 얽은 선반 위에 어지러이 쌓인 물건들 사이로 먼지가 흩날렸다. 쌓여있는 물건들은, 두께나 크기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대부분이 직사각형 모양이었다. 과거의 사람들에게는 필수품이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잡동사니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닌 물건들이다. 그 잡동사니를 주워모아 자신의 거처에 모아둔 괴짜이자 이곳의 주인 준은 어둑어둑한 거처 귀퉁이에 설치한 작업대 앞에서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오래도록 손질하지 않아 거추장스럽게 늘어진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던 물건을 향해 눈을 돌렸다. 조부에게 들었던, 마치 전래동화 같은 이야기의 타래를 되짚으며 방금 막 뚜껑을 들어낸 물건의 내부를 들여다 보았다. 용도를 알 수 없는 검은색과 은색 판자들의 조합체. 그것들을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어가며 어떤 용도로 쓰이던 것일까 유추해 보았다. 조부의 말을 바탕으로 추리해 보자면 가장 크고 검은 이 판자가 기록을 보존하는 장치일까? 아니면 이 물건 자체에 동력을 공급하기 위한 장치일까, 각 판이 가진 색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허리를 꺾은 갈대처럼 생긴 이 관은 무엇일까. 물이 길을 따라 흐르듯 무언가가 이 관을 따라 이동하는 것일까. 이 작은 돌기들은 무엇일까. 상단부와 하단부에 직선으로 몇 줄 배치되어 있는데 모두가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것은 또…

 오래동안 머리를 싸매고 궁리해 보았지만 아직도 결론에 다다르지 못한, 스스로에게 수십 수백 번 물었던 질문들을 곱씹으며 매만지던 물건을 다소 거칠에 밀어냈다. 그리고 해가 중천에 떠올랐지만 아직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거처 입구 옆에 세워 둔 호신용 막대기를 집어들고 두어 차례 휘둘러 보았다. 원래 용도가 무엇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가벼운 데에 비해 제법 단단하며 삐걱거리기는 해도 길이 조절이 가능해 멋모르고 덤비는 사람을 상대할 때 유용했다. 오늘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쉬며 우울한 눈으로 그 막대기를 바라보았다. 그가 모은 물건 중 하나는 이 막대기와 이어진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사실 자신의 컬렉션은 조부의 말처럼 지식의 보고, 기술의 결정체, 인류를 다시 번영으로 이끌 물건이 아니라 단순히 탈착 가능하고 사이즈가 다양한 둔기가 아니었을까? 실제로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몇 있었으니.
 엄습하는 어두운 생각을 떨쳐버리고 거처 입구에 세워 둔 나무판을 밀어냈다.

눈부신 햇살에 자신도 모르게 발길을 멈추고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 후 빛에 눈이 익숙해지고, 변함없는 풍경이 그에게 다가왔다. 준은 반쯤 무너진 건물에 꾸린 자신의 거처 입구에서, 그가 살아가는 세상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원래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지고 부식된 건물들, 군데군데 나뒹구는 정체 모를 조형물들. ‘자동차’라고 불렸다는 흉물스러운 물건들의 잔해들. 과거에는 저것들을 가지고 빠른 속도로 다른 곳에 이동할 수 있다 했지만 과연 그랬을까. 지금은 그냥 길을 가는 데 존재하는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그 모든 것들은 무성한 풀과 덩굴들, 그리고 흙으로 덮여 있어 제대로 살펴보기란 쉽지도 않았다. 조부는 본인도 부모님께 들었다며, 툭하면 준을 무릎에 앉혀 놓고 꿈같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하늘을 찌를 듯한 건물들과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상대일지라도 눈 깜빡할 사이에 의사를 소통할 수 있는 수단, 기름이라는 것을 사용해 날아가는 새만큼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는 탈것들, 화면을 누르기만 하면 무슨 물건이든 하루이틀 안에 집 문 앞에 도착하는 사회 시스템.
하지만 그 무엇도 준에게는 와닿지 않았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이 황량한 세상에 살았고, 그런 편리함은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으니까. 편리한 세상 따위, 조모가 들려주던 날개 달린 요정이니 불을 뿜는 용이니 하는 이야기와 똑같을 뿐이었다.

 세상이 이렇게 된 이유는 수십 년도 더 전에 세계 각지에 근소한 시간차를 두고 일었던 지진 때문이라고 했다.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큰 큐모에, 거기다 전 지구를 덮친 거대한 지진. 그리고 그 지진의 연쇄작용으로 각지에서 화산이 폭발했다. 준은 살면서 화산을 본 적이 없지만 듣자 하니 산의 꼭대기에서 연기와 먼지와 자갈과 뜨거운 액체가 쏟아지는 현상이라 했다. 게다가 거기서 끝이 아니라, 지진으로 인한 해일이 전 세계를 덮쳤다. 전례가 없는 자연재해의 연타에 인류는 무력하게 스러질 수밖에 없었다. 건물들은 무너지고, 모든 생활 기반이 불타고 쓸려갔다고 했다. 교통과 통신 수단은 궤멸되어 가족, 친척, 지인들이 살아남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으며 그저 내가 살아남았음을 감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들었다. 어느 지역에 어느 정도의 인류가 생존해 있는지조차 확인이 불가능했고, 지진으로 인해 어느 정도로 지형이 바뀌었는지조차 모를 지경이었다.
살아남은 한줌의 인류는 아무것도 없어진 세상에서 간신히 생명을 이어갔다.
폐허를 뒤져 쓸만한 물건이나 먹을 것, 입을 것을 확보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모든 생활 인프라가 사라진 상황에서 생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수렵과 채집, 제작을 근근하게 체득해 삶을 이어갔다. 인류는 지능과 자유로운 두 손을 활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진화를 거듭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준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잡념을 털어버리고 걸음을 옮겼다. 매일같이 다니는 길이었지만 잠만 자고 일어나면 무성하게 자라는 잡초들을 헤치며 잠시간 나아가자 익숙한 판자문이 보였다.

“양 아저씨, 저 왔어요.”

조심스레 판자문-입구에 판자를 덧대어 놓은 것뿐이지만-을 밀며 들어가자, 가마 옆에 앉아 감자를 까던 수염 덥수룩한 남성이 고개를 들었다.

“준, 늦었구나. 아픈 건 아니고?”

적당히 대꾸하며 양 아저씨의 앞에 앉아 감자를 집어들었다. 준이 올 것이라고 알았던 듯 미리 놓여 있던 조악한 뼈칼을 들어 감자를 까기 시작했다.
양 아저씨와는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부터 친밀하게 교류하던 사이였다. 양 아저씨 부부와 준의 부모님은 함께 밭도 일구고 수렵을 하던 사이로, 자식이 없기 때문인지 준을 매우 아꼈다. 그리고 준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에도 그를 아들처럼 대해 주었다.
준 또한 그들을 자식처럼 따르며 행동을 함께 했지만 아무래도 수렵에 대한 재능은 없었던 듯 방해만 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일찌감치 포기하고 양 아저씨와 부인을 도와 밭을 경작하고 생활에 쓸만한 도구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 다행히도 그는 괜찮은 농부였으며, 가죽을 손질하는 데에는 재능이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옷에 넣으면 좋을 듯한 식물을 발견해 종자와 식물 자체를 채집해 두었다. 이것을 재배하는 데 성공하면 분명 이 근방 사람들의 의복 사정이 좀 더 나아지리라.

“그래서, 그 잡동사니들은 언제까지 쌓아 둘 생각이냐?”

열심히 감자를 깎는데 이미 귀에 딱지가 앉히도록 들은 그 말을 양 아저씨가 다시 꺼냈다. 그는 외딴 곳에서 살며 시간만 나면 잡동사니를 찾아다 거처에 쌓는 준의 생활이 탐탁치 않은지 그쪽 거처를 정리하고 본인들 부부와 함께 살지 않겠냐는 말을 늘 하곤 했다.
하지만 준은 도저히 그의 조부가 남긴 그 그처와 물건들을, 그리고 본인 스스로도 모아 온 물건들을 버릴 수는 없었다. 그 이유가 조부와의 추억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이 언젠가는 찬란했던 인류 문명을 되찾을 실마리라도 찾아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인지는 스스로도 아직 알지 못했다.

지겨운 양 아저씨의 설득이 시작되려는 찰나, 아주머니가 구운 고기 토막을 넙적한 돌판에 얹어 들고 들어왔다. 말수가 적고 몸집도 작은 여성이었지만 의외로 그녀는 동물의 가죽을  깔끔하게 벗겨 무두질까지 해내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어찌나 손놀림이 능숙한지 준은 도저히 따라할 수조차 없었으며 양 아저씨도 부인 앞에서는 꼼짝도 못 했다. 잔소리에서 벗어나게 해준 아주머니에게 마음으로 감사하며 돌판을 받아들었다. 오늘은 토끼고기인 모양이었다. 양 아저씨와 준은 감자 깎는 일은 잠시 쉬고 가마에서 굽던 감자를 꺼내 고기와 곁들여 간단하게 식사를 마쳤다.
그 후는 늘 그랬든 밭일을 돕고 양 아주머니를 도와 가죽을 손질했다.
때때로 양 아저씨네 작물이나 가죽, 고기와 바꾸기 위해 잡다한 물건들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이 있을 때마다 준은 부리나케 달려와 물건을 살폈다. 하지만 그의 컬렉션에 추가할 만한 물건은 없었다.

 해가 기울 무렵, 준은 약간의 말린 고기와 구운 감자를 약간 얻어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집에서 쫓겨났는지 벌을 받는 중인지, 허물어져 가는 건물 밖에 쪼그리고 앉아 무릎에 이마를 댄 남루한 행색의 아이를 발견했지만 애써 외면하고 발을 움직였다.
자신의 거처에 도착했을 때, 전혀 뜻밖의 생물체와 마주쳤다. 귀와 등은 검은색이었지만 다리와 배 부분은 황토빛인 난생 처음 보는 네발짐승이었다. 준의 거처 앞에서 앞다리는 쭉 편 채 엉덩이를 깔고 앉은 그 짐승은 혀를 길게 빼물고 헥헥거리며 준을 바라보았다. 새까만 눈동자와 앉아 있는 자세에서 공격성은 엿보이지 않았지만, 드러난 이빨을 보고 준은 호신용으로 들고다니는 막대기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낯선 것은 그 네발짐승 뿐만이 아니었다. 거처 입구에 기대어 둔 판자가 옆으로 치워져 있던 것이었다. 침입자인가, 대체 누구지. 무엇 때문에? 그보다 이 네발짐승은 무시해도 되는 것일까. 집으로 들어간 순간 뒤에서 덮치는 건 아니겠지. 온갖 생각이 교차했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짐승에게 등을 보이지 않도록 주의하며 옆걸음질로 조심조심 이동해 거처로 들어갔다. 일단 입구 쪽에서 보기에 내부가 흐트러진 흔적은 없기에 안심했지만, 침입자가 누구인지, 아직도 이곳에 머물고 있는지, 목적은 무엇인지 무엇 하나 알 수 없었기에 조바심이 느껴지고 막대기를 쥔 손이 축축히 젖어들었다.
그때, 밖에 있던 네발짐승이 큰 소리로 한번 짖었다. 제법 큰 울음소리였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침입자가 안쪽에서 고개를 쑥 내밀었다. 그의 모습을 본 준은 헛것인가 싶어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빛나는 머리카락이었다. 마치 드리워진 석양의 끝자락처럼 빛나는 색을 잠시 넋놓고 보던 그는 잠시 후에야 그의 푸른 눈과 우람한 체구를 볼 수 있었다. 정면으로 맞붙기에는 승산이 전혀 없어보이는 거구의 남자였다. 어린 시절에 조모에게 들었던 이야기에 나오던 거인이 이런 것일까 싶었다.
그 거구의 남자는 준을 보자 활짝 웃으며 한발 성큼 다가섰다. 준은 자연스럽게 한발 뒤로 물러났다.

“Are you 준?”

알 수 없는 언어에 발음도 불분명했지만 그는 자신의 이름을 알며, 또 자신을 찾아 이곳까지 왔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여차하면 양 아저씨네 집까지 도망갈 생각으로 거처 입구를 향해 뒷걸음질쳤지만 어느 틈엔가 일어난 네발짐승이 길을 가로막았다.
이판사판이다. 호신용 막대기를 쥔 손에 힘을 주자 침입자는 다급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Wait! Let’s talk, 얘기! 이야기!”

뻔뻔하기 그지없는 남자였다. 남의 거처에 멋대로 침입해서 뒤지고 있던 주제에 무슨 이야기를 하자는 것일까. 그는 준의 컬렉션들을 손가락질하며 말을 이었다.

“저거, 재미, 많이, 봐?”

대체 무슨 헛소리인가. 준은 역시 이 말도 통하지 않는 침입자를 쫓아내거나 도망치는 게 최선이라 생각하며 어떻게 빠져나갈지 머리를 굴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양 아저씨 말대로 입구를 하나 더 마련해 두는 게 나았으리라.
다행히도 그 정도 눈치는 있는지 그는 다급하게 허리춤을 더듬어 두루마리를 꺼내 펼치더니 정신없이 눈으로 훑기 시작했다.

“interesting… 재미…, stuff… 물건… 재미있는 물건! 많이!”

재미있어 보이는 물건이 많다는 뜻인가. 그게 뭐 어쨌다는 것인가. 이런 종류의 비야냥은 이골이 날 정도로 들었기에 그다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단지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까 하는 생각만이 준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좀처럼 준의 경계심이 누그러들 기색이 보이지 않자, 그는 꿇어 엎드려 자신이 가져온 거대한 꾸러미를 풀어 헤치더니 내용물을 하나씩 꺼내서 바닥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것들을 본 준의 눈이 서서히 휘둥그래지고, 막대기를 쥔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갔다. 급기야 막대기를 내던지고 그가 꺼낸 물건들 쪽으로 달려가 털썩 무릎을 꿇고 정신없이 들여다보았다. 어느새 거처 안까지 들어온 네발짐승이 준 옆에서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었지만 그런 것에 주의를 쏟을 여력이 없었다.
한순간에 준의 혼을 쏙 빼놓은 침입자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씩 웃었다.

“나, 알렉스. 우리, 할래? 이거, 같아.”

다시 한 번 인류를 발전과 번영으로 이끌 두 연구자의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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